좋은 시 모음 36

달빛 사랑 / 엄원용

저도 내 소식이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남 다 자는 한밤중에 도둑처럼 살그머니 창문을 타고 들어와 온 방을 구석구석 다 뒤지고는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과 그리고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내 서러운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어찌 지내고는 있는지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새벽이 되면 그것이 부끄러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저도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좋은 시 모음 2023.01.22

설날 / 박성렬

함박눈 내리는 마을 어귀에 반가운 자식들 미소로 반기며 조용하던 집안은 손주들 재롱에 왁자지껄 웃음바다 할머니 품에 안기고 형제들 이야기 꽃피우며 고부간 정겨운 옛이야기 시간은 시냇물처럼 흘러가는데 귀경길에 눈물 훔치며 쌈짓돈 손주들 건네주면서 두 손 꼭 붙잡고 놓지 못하는 할머니 처가집 마당은 조용하고 창밖은 다시 찬 기운이 감돈다.

좋은 시 모음 2023.01.18

눈 오는 지도 (地圖) /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것처럼 창(窓)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地圖)우에 덮인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과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좋은 시 모음 2023.01.15

새해 아침 /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

좋은 시 모음 2023.01.01